"건담에 타라, 여까."

익숙한 목소리에 여까는 고개를 들었다. 낡은 작업복에 기름때를 묻힌 채 서 있는 남자, 카일이었다. 그의 손에는 여까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 마지않던 육중한 기계 생명체, 건담의 조종석 해치를 여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무슨 소리야, 카일? 너도 알잖아, 난…"

"알아, 네 팔," 카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여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저 괴물들을 막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카일의 시선 너머,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괴물'이라 불리는 미지의 존재, '베헤모스'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며 다가오는 재앙 앞에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여까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 쥐었다. 5년 전, 베헤모스와의 전투에서 잃은 팔은 흉측한 몰골로 남아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카일, 난 할 수 없어. 조종은 고사하고, 이 팔로는…"

"할 수 있어!" 카일이 거칠게 여까의 말을 잘랐다. "네 능력은 네 팔에 있는 게 아니야, 여기!" 그는 여까의 가슴을 가리켰다. "네 강인한 정신,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에 있는 거라고!"

카일의 외침에 여까는 잊고 있던 기억에 휩싸였다. 어릴 적, 고철더미에서 처음 건담을 발견했을 때의 벅찬 감동. 조종 훈련을 받으며 꿈을 키웠던 시간들. 그리고, 베헤모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그 날의 절망까지.

여까의 눈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카일의 말처럼, 다시 한번 하늘을 날고 싶다는, 베헤모스에게서 모두를 지켜내고 싶다는 끓어오르는 투지였다.

"좋아." 여까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건담에 태워줘, 카일."

카일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 "부탁한다, 여까. 인류의 미래는 너에게 달렸어."

여까는 망설임 없이 열쇠를 받아들고 건담을 향해 걸어갔다. 거대한 강철의 문이 열리고, 여까는 조종석에 올라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지는 순간,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다!'

여까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조종석에 몸을 맡겼다. 그녀의 손이 능숙하게 조종간을 움직이자, 잠들어 있던 거인이 깨어나는 듯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건담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여까가 조종하는 건담은 베헤모스를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