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거창한 제목과 달리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진짜 말 그대로 호두파이 14판을 집에서 하나씩 구워서 들고 여의도 공원으로 갔다는 게 전부입니다.
다녀온 사이에 뒷처리라던지 밀린 마감이라던지 바빠서 일주일이나 늦게 글을 쓰게 되었네요.
쓰다보니 반쯤 자랑글 비슷한게 되었는데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발단:
여의도공원 촛불 시위 현장에서 다같이 노상에 노트북 깔고 게임을 개발한다고 합니다.
아니 이런 흥미진진한걸 도당채 어케 참는단 말인가?
도파민이 넘치는 현장에는 그에 걸맞는 디저트가 필요한 법이지!
전개:
그래서 만들라는 게임은 안만들고 호두파이를 10판 구워서 나눔하기로 약속했습니다 (?)
아니 뭐 그냥... 허접 개발자라 뭐 보여주긴 민망해서...
평소에 취미로 항상 굽던 호두파이나 좀 넉넉하게 가져가볼까 하여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사실 이것도 핑계고 왜 그러고 싶었는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암튼 그래서 호두파이 10개와 그냥 먹으면 목맥히니까 따듯한 커피를 3리터정도 챙겨갈까 했죠.
호두파이 제작 과정
호두파이가 무려 10판이기 때문에 한 판씩 반복해서 구우려면 너무 번거롭고 힘들 것 같아 10개분의 필링을 먼저 만들어둡니다.
재료는 10판 기준으로 녹인 버터 400g과 설탕 400g, 계란 30알, 올리고당 1.2kg이 섞여져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바닐라 오일 50ml와 계피가루, 넛맥가루 등을 넣습니다. 저는 전체적인 밸런스와 발색을 위해 파프리카가루와 소금, 후추도 극미량 넣습니다.
계피가루가 뭉치면 먹을때 입안에서 격렬하게 존재감을 발휘하기 때문에 거름채를 반 담가두고 그 위에 가루를 일괄 투입하여 잘 섞어줍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파이 굽기의 시간입니다.
파이 틀에 버터를 발라둔 뒤 그 위에 파이 반죽을 적당한 두께로 잘 붙여줍니다.
일반적인 파이나 타르트와는 달리 패스츄리 반죽을 써서 파이를 만들면 부드럽고 바삭한 식감으로 마지막까지 즐겁게 먹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한동안은 집에서 직접 반죽해서 버터 넣고 접고 버터넣고 접고 접고 접고..... 했었지만 주방에 밀가루 청소하는게 너무 고통스럽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10인치짜리 패스츄리 타입 냉동 피자 도우를 사서 썼습니다. 이전에 한 20판정도 해먹어봤더니 충분히 바삭하고 맛있더라구요.
파이 위에 호일을 깔아줍니다. 알루미늄이나 종이 호일 어느쪽이든 상관 없습니다.
호일을 파이 위에 깔아주는 이유는
바로 요 누름돌을 위에 올려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파이를 초벌하는 과정에서 가운데 부분이 부풀어오르며 가장자리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참사를 막기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저도 알고싶지 않았습니다.
누름돌은 황토 재질과 팥, 알루미늄 등이 있습니다. 황토가 제일 저렴하고 팥은 요즘 비싸졌고 알루미늄은 뒷처리도 깔끔한 만큼 비싸더라구요.
이제 누름돌을 얹은 파이를 오븐에 넣어줍니다.
이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작은 가정용 에어프라이어 겸용 오븐이다보니 하나씩 굽는게 고작입니다.
저번에 두세판씩 동시에 구워보니 각기 제멋대로 덜익거나 더익어서 아주 곤란하더군요.
무엇보다 계란 베이스의 필링이라 엄청나게 부풀어오릅니다. 하나 이상은 못넣어요.
이제 180도로 예열된 오븐에 파이를 넣고 15분간 초벌해줍니다.
이제 호두파이에서 가장 중요한 호두의 전처리를 해보겠습니다.
호두는 다른 견과류들처럼 지방의 함량이 높은 식재료입니다.
그렇다보니 그냥 쓸때보다 한 번 가열해주면, 나아가 소금과 함께 팬에 볶아주면 전체적인 풍미가 확 살아나게 됩니다.
원리는 사실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근데 그렇게 해먹어보니 더 맛있어서 그냥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적정량 구매할 수 있는 호두중에서 가장 품질이 괜찮은 호두로 골랐습니다.
주변 마트를 포함해서 많은 호두를 써보았는데 손질되어있는 제품 중에서는 저게 가장 품질이 괜찮았습니다.
평소에는 반태 (두뇌모양) 호두를 통으로 써서 씹는 식감을 살리는 쪽으로 만드는게 제 개인적인 취향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게 목표이다보니 좀 더 보편적인 취향에 맞는 분태 호두를 2kg 구매했습니다.
팬에 호두를 넣고 약한 불에 들들 볶아줍니다
어지간히 불에 방치하는게 아닌 이상 적절히 마이야르 반응까지만 얻고 잘 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성실하게 볶아주면 더 맛있어질겁니다. (아마도)
다 볶은 호두도 마찬가지로 쓰기 편하게 보울에 덜어서 담아줍니다.
담아주기 전에 넓은 채반에다 한번 걸러서 호두 껍질 가루를 털어주고 쓰면 호두의 씁쓸하고 텁텁한 뒷맛이 깔끔해집니다.
첫 파이의 초벌이 진행되는 사이에 필링 준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저 계량컵에 필링 360g과 호두 120g을 넣어서 계량하여 쓰면 됩니다.
초벌이 완료된 모습입니다.
반죽의 베이스가 패스츄리이다보니 지금 단계는 아주 쫄깃하고 폭신폭신한 질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패스츄리이다보니 겉면이 얇게 벗겨지고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란 노른자에 물이나 우유를 미량 섞은 계란물을 전체적으로 발라주어 4분간 더 구워줍니다.
그러면 액체상태인 필링이 반죽에 스며들어 눅눅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더불어 전체적인 색감도 더 먹음직스러워지게 됩니다.
계란물 코팅 이후 4분간 구운 후의 모습입니다.
노란빛으로 아주 이쁘게 잘 코팅이 되었네요. 여기서 필링을 부어 더 구워내면 아주 먹음직스러운 갈색이 될 것입니다.
계획했던 대로 필링을 계량하여 코팅된 파이에 부어줍니다.
굉장히 찰랑찰랑거리기 때문에 다시 오븐에 넣을때 넘쳐서 흘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실 업소라면 일괄적으로 매일 청소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까진 안해도 되지만 집에 저 끈적한 필링을 조금이라도 흘린다면 무척 괴로울 것입니다.
이대로 오븐에 넣고 마찬가지로 180도에서 25분 구워줍니다.
굽는 동안에 오븐이 건방지게 쉬는시간을 가지지 못하도록 바로 다음 파이틀을 준비해서 즉시 초벌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합시다.
이렇게 하면 45분마다 호두파이가 하나씩 생산되므로 이론상 3시간에 4판, 12시간이면 16판까지도 구울 수 있습니다.
사실 오븐에서 막 꺼내온 파이의 사진은 못찍었습니다.
쉴틈없이 파이 로테이션을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오븐에서 막 꺼낸 파이는 접어둔 피자 박스에 종이호일을 깔고 그 위에 올려 잠시 창가에 두어 식혀줍니다.
날이 상당히 추워져서 다음 파이가 완성되는 45분 안에는 적당한 온도로 식게 됩니다.
다음 파이가 완성되면 식혀둔 파이를 가져와 파이 커팅용 칼로 8등분해줍니다.
파이 커터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파이 지름보다 손가락 한두마디 긴 사이즈라 자르기 아주 편합니다.
잡고 파이를 슥슥 눌러주며 자르다 보면 왠지 레넥톤이 된 기분도 듭니다.
쿨이 돌때마다 파이를 자르고 토막내줍시다.
윗 내용까지가 파이 하나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었습니다. 45분만에 파이 하나가 뚝딱!
자, 이제 이 과정을 10번 반복하면 됩니다! 10시간도 안걸린다니 정말 쉽고 간단하죠!
...
..
.
그렇게 시간은 16시간이 지났고
어쩌다보니 파이가 14판이 되었습니다.
사실 10판을 다 굽고나서 보니 집에 재료가 제법 남을 것 같아서 더 못구울 때까지 계속 구워볼까 했는데
그렇게 총 16판이 나오더군요
한 판은 집에 꽁쳐두고 한 판은 이웃에게 2조각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파이 14판과 아침에 뜨겁게 타둔 커피를 담은 900ml 보온병 네개를 검찰 박스에 넣어줍니다.
컨셉은 대충... 가내 불법 파이 제작 혐의로 압수수색 당해 여의도 공원으로 환수조치 당하는 걸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옆에는 종이컵과 포장해가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예비용 포장 박스도 챙겨두었습니다. 잘 담으면 4조각까지 들어갑니다.
자~ 압수수색 드가자~
위기:
게임잼 현장에 도착했을땐 오후 2시반쯤이었습니다.
사실 이날 사촌형네 결혼식이 정오에 있어서 근처 편의점에 맡겨두고 끝나자마자 찾아서 들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 박스 무게 다 합치면 22kg 가까이 되었는데 성북구에서 여의도까지 들고 이동하니 손가락도 아프고 팔꿈치가 엄청 뻐근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일단 깔고 츄라이츄라이 해보는데 예상했던 것 보다도 사람이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파이 나눔합니다~ 좀 드셔보세요~ 해볼까 생각하면서 왔는데
이정도로 인파에 압도당하니까 좀처럼 큰 소리가 안나오더군요 ㅋㅋ;;
춥고 배고픈데 벙찌기까지 해서 얼타고 있기엔 좀 민망해서 5판정도는 근처 의료나 소방 부스에 돌아다니면서 기부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보니 게임잼 하고 계시던 분들이 주섬주섬 한 조각씩 드시고 계시더군요.
사실 요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맛있게 드셔주시기만 해도 행복한 법인데요
그대로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게임 개발하다가 계속 말아먹으면 진짜로 디저트 카페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량 보충하고 열심히 게임을 개발중이신 지인의 뒷모습
전날부터 하루종일 파이굽고 들고오면서 제대로 먹질 못했기 때문에 계속 커피와 파이만 처묵처묵 하고 있었더니
행인분들께서 관심을 가지고 먹어봐도 되냐고 물어봐 주셨습니다.
제발... 먹어주십쇼... 남아서 도로 들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심지어 파이와 커피가 깔려있다보니 일종의 임시 거점?처럼 되어버려서
자꾸 동료분들과 지나가는 행인분들이 쿨하게 과자나 초콜릿을 기부해주셨습니다.
나중에 돌아갈때 보니 올때 들었던 무게와 크게 차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진짜 엄청 다 나눠주고 했는데도...
감... 감사합니다... 감사.. 해요.... 어흑흑...
그렇게 계속 개발하면서 같이 구호 외치고 파이도 나눠주고 하다보니 어느덧 세 판 정도만 남기고 다 나눔이 되었습니다.
결말:
한참 표결이 시작되려던 시점에 문득 보니 무수히 많은 깃발들 사이로 비추는 석양이 참 이쁘더라구요.
그래서 주변분들에게 "와 님들 저기 보세요 엄청 거대한 촛불이 있어요" 했더니 다들 말없이 보고계셨던게 기억에 남습니다.
이때 풍경은 참...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네요.
계속 파이 집어먹다보니 어느덧 사람들의 밀도가 엄청나게 올라가있는게 느껴져서
급히 다들 짐 챙겨서 끌어앉고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인터넷도 아예 안터지던...
보면서 엄청 다양한 응원봉들이 있었는데 마인크래프트 횟불과 언월도 응원봉(?) 그리고 에픽하이 박규봉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ㄹㅇ 간지 조지는 전설등급 시위템처럼 보여서 저도 언젠가 그런데 쓸만한 발광하는 막대 하나 찾아서 구비해놓을까 합니다.
(가결 후)
그렇게 어찌저찌 짐을 다 챙기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웬만한 대중교통은 시도조차 못하겠더라구요.
결국 지인분들과 짐을 조금씩 나눠들고 마포대교를 걸어서 공덕역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짐을 들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서 그 긴 마포대교를 건너가다보니 참...
짐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분명히 파이 12판과 커피 3리터를 다 나눠주고 돌아올때는 적어도 15kg은 더 가벼워져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20L 종량제 봉투 하나가 꽉 차고도 남을 정도로 주전부리가 남아있어서 (심지어 그만큼을 다 나눠주고 나서 남은 것)
그리고 올때보다 체력적으로 엄청 한계이기도 해서 그런지 진짜 죽을맛이었습니다.
심지어 잠도 3시간밖에 못잤기 때문에....
결국 못참고 공덕역까지 걸어가서 제가 낼테니 같이 택시타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간신히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집에 돌아와보니
집이 너무 개판이었습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전날에 계산보다 조금 더 긴 15시간 동안 내리 파이를 굽고 제대로 정리도 못한 채 3시간만 자고 커피 타서 들고 나온거였거든요.
게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파이 2판은 한동안 제 점심 식단에 넣어서 소비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호두가 영양도 풍부하고 하니 점심마다 한 조각에 구운 계란 두 알씩만 먹으면 대충 영양 밸런스는 맞을 것 같네요.
그렇게 뭔가... 순식간에 무언가가 후루룩 지나가버렸습니다.
어째서 게임 개발도 픽셀아트도 아닌 호두파이를 들고 나갈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보람있었잖아요! 한 조각 해!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다음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우리 역붕이들에게도 재밌는 게임과 맛있는 파이를 함께 대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래봅니다.
(시그니처 모둠파이의 모습)
요약:
1. 하라는 개발은 안하고 파이 구워서 나눔함
2. 근데 뒤지게 많이 구움
3. 그래서 이거 왜 했는지는 본인도 모름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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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촛불 게임잼 보고 와 X나 재밌겠다 했는데 보람차게 즐기고 오셨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결 얘기나온거면 저번주 같은데 혹시 요번주도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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